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절충론 ==== 절충론적 시각은 원폭의 영향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전통주의와 소련의 역할만을 과장하는 수정주의 대신 상술한 두 사건 모두 일본의 항복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한다. 절충론자들에 따르면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은 서로 뒤엉킨 사건일 뿐만 아니라 거의 동시간대에 발생하여 두 사건의 영향을 무자르듯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실제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먼저 이루어지고 사흘 후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같은 날에 발생했다.] 실제로 원인과 결과가 1:1로 대칭되지 않고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당시 일본의 상황을 보면 원자폭탄이라는 미증유의 무기가 히로시마에 투하되어 도시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일본 군부가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이와 같은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나가사키 2차 원폭 투하와 소련의 선전포고가 함께 발생했다. 정치적/사회적으로는 일본 시민들의 동요를 잠재우고 결사항전을 외치는 것이 원폭으로 인해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소련을 통한 연합국과의 협상 시나리오가 불가능해졌다. 일본의 정치결정권을 지닌 어전회의 참가자들은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원폭 투하 이전부터 항복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항복을 주장한 자들도 있었으며,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 이후 항복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 개인조차 두 사건 모두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원폭 투하나 소련 참전 중 하나만 있었다면 항복을 거부했을 사람이 두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자 항복에 찬성하는 것은 인간사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꼭 제3의 악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두 악재의 합이 그 사람의 임계치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군부 내에서도 사람에 따라 항복을 결정한 원인이 모두 달랐다. 이러한 이유로 절충론자들에 따르면, 특정 사건 하나가 절대적인 요인이라기보단 두 사건 모두 일본의 항복 결정에 동시에 영향을 미쳤으며 해당 논쟁은 상호복합적인 인간사의 특성을 무시한 단견에서 발생했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